평창이씨 이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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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울풍수 김규순 조회 45 작성일 25-02-14 21:16본문
평창이씨 이계남의 묘지를 풍수학적으로 풀어본 글이 있어 옮깁니다.
평창이씨 이계남(1448-1512)
문음으로 1468년 감찰에 임명되었다.
그후 풍덕군수, 사헌부집의, 우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이조참의, 호조참의 그리고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492년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갔다왔다.
1496년 연산군의 명을 어겨 곤장을 맞았으나
공조참판, 호조판서를 지냈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2등 공신이 되어 평원군에 봉해졌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계남은 평창이씨가문에서
중시조로 추앙받는 분이다.
이계남의 무덤 주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산321-1(옮긴이 수정 산 312-1)
시조 이 광은 고려인종 때 사람으로 평장사를 지냈다.
(묘)는 북강원 이천군 고미탄면금평리에 있다.
시조부터 14대까지 줄곧 벼슬이 끊어지지 않는다.
조선 건국후 6세 이 숙 은 노산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안사는 이성계의 고조부이다.
용비어천가에서 육룡으로
칭송되는 분이다.
이안사는 목조로, 이안사의 배우자 이숙의 딸은 효공왕후 이씨로 추봉되었다.
평창이씨는
일찌기 조선과 인연이 닿은 금수저였다.
7세 이 태의 (묘)가 시조 묘 부근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이천군을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강원의 이천군 고미탄면에 있는 산소가 명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8세 이천기는 충목왕때 사신으로
원나라에 입조하였다가
남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천자로부터 준마 1필과 검 한자루를 하사받았다.
포은과 야은과 교류한 친구였다.
(묘)는 장단군 동도면에 있다.
10세 이종미는 이천기의 세째 손자이다.
11세 이영서
12세 이계남
으로 이어진다.
평창이씨는 10세부터 후손이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11세 영자돌림에서 7개의 지파가 새로 생겼다.
12세에서 5개의 지파를 추가하여 후손번성의 전성기를 맞이 했다.
이로써 판단해보면,
평창이씨 가문의 후손번성은
7세의 이태 혹은 8세 이천기 묘의 발응이 아닐까 한다.
조부 이종미_돈녕부승
_(묘)와부읍 월문리.
이종미는 태조 이성계 동생 의안대군의 아들 이징(1375-1435)의 딸과 결혼했다.
아버지 이영서(1410-1450)_예조정랑
_(묘)와부읍 월문리에서 풍덕으로 이장.
이에 군문(軍門) 안에서 회의를 열어 유자광(柳子光)ㆍ이계남(李季男)ㆍ김수경(金壽卿)ㆍ유경(柳涇)으로 하여금 머물러서 대궐 문을 지켜 도주할지 모르는 폐주를 지키게 하고,성희안 등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문 앞에 나아가서 자순대비(慈順大妃 성종의 계비이며 중종의 어머니)에게 처분을 청하니 조금 후에 문을 열고 그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고사본말
부인 파평윤씨(윤사윤의 딸)은 좌측 능선에 있고,
이계남 묘 위에 어머니 상당한씨의 무덤이 있다.
부인파평윤씨는 윤번의 손녀이다.
윤번은 세조의 국구로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이계남 부인의
친정고모가 정희왕후이다.
이계남 가계는 왕실의 인척 집안과 혼인을 하였고
동생 이계동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니
평창이씨 가계의 전성기를 맞아하였다.
10세 이종미부터
중앙정치의 핵심권력 가문과
정략적(?) 결혼이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왕실과의 혼인관계는 블루오션이었다.
어머니 상당한씨 묘에서 내려다 본 이계남의 묘
안산이 균형 잡혀 있고 안정된 모습으로 보기 좋다.
조산도 목성을 끼고 있어서 나무랄데가 없다.
이계남의 신도비
비각에 가두어 놓아 접근이 불가하다.
신도비는 사람이 읽도록하기 위함인데
지금은 무슨 보물인 양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고 있어 안타깝다.
1506년(중종1)중종반정 공신 명호
1등은 5원으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장정(張珽), 경주(景舟)이다.
2등은 13원으로, 이효성(李孝誠), 심순경(沈順經), 변수(邊脩), 최한홍(崔漢洪), 형로(衡老), 조계상(曺繼商), 유순(柳洵), 김수동(金壽童), 이감(李勘), 이계(李誡), 이계남(李季男), 구수영(具壽永), 이활(李濊)이다.
3등은 31원으로, 고수겸(高守謙), 심형(沈亨), 황탄(黃坦), 유세웅(柳世雄), 유계종(柳繼宗) 등이다.
4등은 58원으로, 변준(卞儁), 변사겸(邊士謙), 이숙창(李叔昌), 박이검(朴而儉), 유영(柳濚) 등이다.
전율통보 별편 제8조 공신병호
내룡 입수에 맺힌 잉육이 보기 좋다.
(이런 표현은 풍수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풍수문외한에게는 무척 어려운 문장이다)
* 묘지로 연결되는 능선은 산의 정기를 전달해 주는 통로이므로 그 생김새를 중요하게 보는데
잉육이란 산의 정기가 전달되다가 묘지로 연결되는 능선에서 모여 한식 숨을 돌리는 곳을 말한다.
잉육이 발달하면
땅의 기운이 묘지로 전달되는 징조로 본다.
용맥[능선]이 좌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서
T자형태로 분기되는 용맥의 연결이 의심스럽다.
사진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용맥이 진행되는데 밑에서 치고 올라오고 있다.
화살표는 용의 진행방향이다.
좌에서 우로 계속 올라가는 용맥인데
횡룡에서 T자 형태로 분기하는 용맥이 올라가다가 역으로 연결되는 모습이라 의심스러운 용의 행보이다.
***
이계남의 묘로 연결되는 용맥을 보고
서울풍수 회원들의 갑론을박(?)이 있었다.
용맥의 흐름이 사진의 좌->우로 흐르는가
아니면 우->좌로 흐르는가에 따라 용맥의 힘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계남의 묘로 들어오는 용맥은 횡룡입수인데
횡룡에서 분기하는 지점은 푹 꺼진 상태이다.
좌우에서 봉우리를 맺고 있는 상황이기에
좌와 우측이 높고 중간이 낮아진 현상이다.
그러면 주용맥은 어느 쪽인가도 중요하다.
사진의 좌측에 천마산과 백봉산의 주 능선이 있다.
따라서 사진의 우측이 산줄기의 끝이 된다.
네이버항공지도를 보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이계남의 무덤이 횡룡입수이다.
백봉산과 천마산의 봉우리가 낙산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지도로 확인된다.
풍수지형에서 고무적인 혈증의 하나이다.
『신증』 본조 이계남(李季男)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이계동(李季仝) 계남의 아우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領中樞)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헌무(憲武)이다. 그때 세상에서 명장(名將)이라고 일컬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46권 강원도 평창군
내룡이 횡룡에서 분기할 시에
주용맥과 정상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계남의 내룡과 같이
지기가 용맥을 타고 지나갔다가 U턴해서다시 내려오는 경우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자연현상에서 물이 거꾸로 올라가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비가 하늘에서 내리다가 바람에 의해 잠시 거꾸로 하늘로 치솟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상은 잠깐이고
결국은 대세를 따라간다.
만약에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 힘은 극히 미약할 것이다.
氣者水之母 有氣斯有水
기는 물의 근본이니 기가 있다는 것은 곧 물이 있다는 것이다.
금낭경_기감편
기는 물의 근원이라는
풍수원리에 따라
기와 물은 그 성격이 비슷하므로,
기의 성향이나 특성은 물의 성향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제 아무리 사격이 좋아도
용맥이 정상적이면서 튼튼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한다.
묘지를 풍수로 판단하는 경우
용맥이 참인지 거짓인지
용맥이 강한지 약한지를
구분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계남의 경우
용의 등급보다 혈의 모양에 신경을 쓴 무덤으로 보인다.
묘지를 조성할 땅의 덩어리와
속기처 그리고 잉육은 잘 구비되어 있지만
내룡의 건실함은 자신하기 어렵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 판단영역 밖이다.
<정경부인상당한씨지묘>
아버지의 계배(係配) 즉 둘째부인 상당한씨의 무덤이다.
아버지는 함길도 감사를 역임한 한혜(1403-1431).
한혜는 한명회와 육촌간이다.
할아버지는 한상경
증조부는 한수이다.
한혜의 며느리가 파평윤씨 윤번의 6녀로 정희왕후의 언니이다.
이계남에게 한계미와 수양대군은 이모부이다.
든든한 혈연관계이다.
상당한씨 묘역에서 전순에 박힌 돌에 주목한다.
전순에 박힌 돌은
풍수지형에서 탁월한 현상이다.
돌이 없는 산인데 드러난 돌이라
뜬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뜬돌이 아니라면 혈증의 하나이다.
이계남의 장남 이 광(1474-1496)은 문과급제하고
승문원부정이 되었으며,
한명회의 손녀와 결혼하였으나 23세로 요절하였다.
절손되어 동생의 아들 희철을 양자로 들였다.
손자 이희철은 사직(정5품)에 이르렀고 한명회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이후 2대가 절손되었고 봉사손으로 양자를 들였으나,
양자를 들이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
이계남의 차남 이량(1477-1522)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돈녕부주부로 근무했다.
전주이씨 남천군의 딸과 혼인을하였다.
남천군의 아버지는 영순군, 할아버지는 광평대군으로 왕실의 사람이었다.
손자 희현은 마전군수를 역임했다.
증손자 부는 대호군을 역임했다.
***
그러나 그 후 16세, 17세 18세, 19세까지 4대 연달아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관직명은 고사하고 생몰연대나 배우자의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않다.
***
갑자기 한미한 가문으로 전락하고 있는 느낌이다.
무슨 변고가 있었던 것일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가계가 몰락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조선왕실과 엮여 있는 집안이 이렇게 몰락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경우이다.
이계남의 손자대에서 중앙권력에서 급격하게 멀어지고 있다.
풍수공부는 족보와 현장을 연계하여 확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계남 묘에서 내룡
의심스런 부분이
족보에서 발응(?)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조선초기 반짝하다가
조선갑족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이 풍수 때문일까?
[출처] [조선] 평창이씨 이계남*|작성자 서울풍수 김규
평창이씨 이계남(1448-1512)
문음으로 1468년 감찰에 임명되었다.
그후 풍덕군수, 사헌부집의, 우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이조참의, 호조참의 그리고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다.
1492년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갔다왔다.
1496년 연산군의 명을 어겨 곤장을 맞았으나
공조참판, 호조판서를 지냈다.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2등 공신이 되어 평원군에 봉해졌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계남은 평창이씨가문에서
중시조로 추앙받는 분이다.
이계남의 무덤 주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산321-1(옮긴이 수정 산 312-1)
시조 이 광은 고려인종 때 사람으로 평장사를 지냈다.
(묘)는 북강원 이천군 고미탄면금평리에 있다.
시조부터 14대까지 줄곧 벼슬이 끊어지지 않는다.
조선 건국후 6세 이 숙 은 노산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이안사는 이성계의 고조부이다.
용비어천가에서 육룡으로
칭송되는 분이다.
이안사는 목조로, 이안사의 배우자 이숙의 딸은 효공왕후 이씨로 추봉되었다.
평창이씨는
일찌기 조선과 인연이 닿은 금수저였다.
7세 이 태의 (묘)가 시조 묘 부근에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이천군을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강원의 이천군 고미탄면에 있는 산소가 명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8세 이천기는 충목왕때 사신으로
원나라에 입조하였다가
남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천자로부터 준마 1필과 검 한자루를 하사받았다.
포은과 야은과 교류한 친구였다.
(묘)는 장단군 동도면에 있다.
10세 이종미는 이천기의 세째 손자이다.
11세 이영서
12세 이계남
으로 이어진다.
평창이씨는 10세부터 후손이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11세 영자돌림에서 7개의 지파가 새로 생겼다.
12세에서 5개의 지파를 추가하여 후손번성의 전성기를 맞이 했다.
이로써 판단해보면,
평창이씨 가문의 후손번성은
7세의 이태 혹은 8세 이천기 묘의 발응이 아닐까 한다.
조부 이종미_돈녕부승
_(묘)와부읍 월문리.
이종미는 태조 이성계 동생 의안대군의 아들 이징(1375-1435)의 딸과 결혼했다.
아버지 이영서(1410-1450)_예조정랑
_(묘)와부읍 월문리에서 풍덕으로 이장.
이에 군문(軍門) 안에서 회의를 열어 유자광(柳子光)ㆍ이계남(李季男)ㆍ김수경(金壽卿)ㆍ유경(柳涇)으로 하여금 머물러서 대궐 문을 지켜 도주할지 모르는 폐주를 지키게 하고,성희안 등은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문 앞에 나아가서 자순대비(慈順大妃 성종의 계비이며 중종의 어머니)에게 처분을 청하니 조금 후에 문을 열고 그들을 들어오게 하였다.
연려실기술 제6권 연산조고사본말
부인 파평윤씨(윤사윤의 딸)은 좌측 능선에 있고,
이계남 묘 위에 어머니 상당한씨의 무덤이 있다.
부인파평윤씨는 윤번의 손녀이다.
윤번은 세조의 국구로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그러므로 이계남 부인의
친정고모가 정희왕후이다.
이계남 가계는 왕실의 인척 집안과 혼인을 하였고
동생 이계동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으니
평창이씨 가계의 전성기를 맞아하였다.
10세 이종미부터
중앙정치의 핵심권력 가문과
정략적(?) 결혼이
잘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 왕실과의 혼인관계는 블루오션이었다.
어머니 상당한씨 묘에서 내려다 본 이계남의 묘
안산이 균형 잡혀 있고 안정된 모습으로 보기 좋다.
조산도 목성을 끼고 있어서 나무랄데가 없다.
이계남의 신도비
비각에 가두어 놓아 접근이 불가하다.
신도비는 사람이 읽도록하기 위함인데
지금은 무슨 보물인 양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고 있어 안타깝다.
1506년(중종1)중종반정 공신 명호
1등은 5원으로,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유순정(柳順汀), 장정(張珽), 경주(景舟)이다.
2등은 13원으로, 이효성(李孝誠), 심순경(沈順經), 변수(邊脩), 최한홍(崔漢洪), 형로(衡老), 조계상(曺繼商), 유순(柳洵), 김수동(金壽童), 이감(李勘), 이계(李誡), 이계남(李季男), 구수영(具壽永), 이활(李濊)이다.
3등은 31원으로, 고수겸(高守謙), 심형(沈亨), 황탄(黃坦), 유세웅(柳世雄), 유계종(柳繼宗) 등이다.
4등은 58원으로, 변준(卞儁), 변사겸(邊士謙), 이숙창(李叔昌), 박이검(朴而儉), 유영(柳濚) 등이다.
전율통보 별편 제8조 공신병호
내룡 입수에 맺힌 잉육이 보기 좋다.
(이런 표현은 풍수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풍수문외한에게는 무척 어려운 문장이다)
* 묘지로 연결되는 능선은 산의 정기를 전달해 주는 통로이므로 그 생김새를 중요하게 보는데
잉육이란 산의 정기가 전달되다가 묘지로 연결되는 능선에서 모여 한식 숨을 돌리는 곳을 말한다.
잉육이 발달하면
땅의 기운이 묘지로 전달되는 징조로 본다.
용맥[능선]이 좌에서 우측으로 진행하면서
T자형태로 분기되는 용맥의 연결이 의심스럽다.
사진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용맥이 진행되는데 밑에서 치고 올라오고 있다.
화살표는 용의 진행방향이다.
좌에서 우로 계속 올라가는 용맥인데
횡룡에서 T자 형태로 분기하는 용맥이 올라가다가 역으로 연결되는 모습이라 의심스러운 용의 행보이다.
***
이계남의 묘로 연결되는 용맥을 보고
서울풍수 회원들의 갑론을박(?)이 있었다.
용맥의 흐름이 사진의 좌->우로 흐르는가
아니면 우->좌로 흐르는가에 따라 용맥의 힘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계남의 묘로 들어오는 용맥은 횡룡입수인데
횡룡에서 분기하는 지점은 푹 꺼진 상태이다.
좌우에서 봉우리를 맺고 있는 상황이기에
좌와 우측이 높고 중간이 낮아진 현상이다.
그러면 주용맥은 어느 쪽인가도 중요하다.
사진의 좌측에 천마산과 백봉산의 주 능선이 있다.
따라서 사진의 우측이 산줄기의 끝이 된다.
네이버항공지도를 보면 간단하게 해결된다.
이계남의 무덤이 횡룡입수이다.
백봉산과 천마산의 봉우리가 낙산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지도로 확인된다.
풍수지형에서 고무적인 혈증의 하나이다.
『신증』 본조 이계남(李季男)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이계동(李季仝) 계남의 아우로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領中樞)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헌무(憲武)이다. 그때 세상에서 명장(名將)이라고 일컬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46권 강원도 평창군
내룡이 횡룡에서 분기할 시에
주용맥과 정상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계남의 내룡과 같이
지기가 용맥을 타고 지나갔다가 U턴해서다시 내려오는 경우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자연현상에서 물이 거꾸로 올라가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비가 하늘에서 내리다가 바람에 의해 잠시 거꾸로 하늘로 치솟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현상은 잠깐이고
결국은 대세를 따라간다.
만약에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 힘은 극히 미약할 것이다.
氣者水之母 有氣斯有水
기는 물의 근본이니 기가 있다는 것은 곧 물이 있다는 것이다.
금낭경_기감편
기는 물의 근원이라는
풍수원리에 따라
기와 물은 그 성격이 비슷하므로,
기의 성향이나 특성은 물의 성향에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다.
제 아무리 사격이 좋아도
용맥이 정상적이면서 튼튼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한다.
묘지를 풍수로 판단하는 경우
용맥이 참인지 거짓인지
용맥이 강한지 약한지를
구분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계남의 경우
용의 등급보다 혈의 모양에 신경을 쓴 무덤으로 보인다.
묘지를 조성할 땅의 덩어리와
속기처 그리고 잉육은 잘 구비되어 있지만
내룡의 건실함은 자신하기 어렵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 판단영역 밖이다.
<정경부인상당한씨지묘>
아버지의 계배(係配) 즉 둘째부인 상당한씨의 무덤이다.
아버지는 함길도 감사를 역임한 한혜(1403-1431).
한혜는 한명회와 육촌간이다.
할아버지는 한상경
증조부는 한수이다.
한혜의 며느리가 파평윤씨 윤번의 6녀로 정희왕후의 언니이다.
이계남에게 한계미와 수양대군은 이모부이다.
든든한 혈연관계이다.
상당한씨 묘역에서 전순에 박힌 돌에 주목한다.
전순에 박힌 돌은
풍수지형에서 탁월한 현상이다.
돌이 없는 산인데 드러난 돌이라
뜬돌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뜬돌이 아니라면 혈증의 하나이다.
이계남의 장남 이 광(1474-1496)은 문과급제하고
승문원부정이 되었으며,
한명회의 손녀와 결혼하였으나 23세로 요절하였다.
절손되어 동생의 아들 희철을 양자로 들였다.
손자 이희철은 사직(정5품)에 이르렀고 한명회의 증손녀와 결혼했다.
이후 2대가 절손되었고 봉사손으로 양자를 들였으나,
양자를 들이는 일이 되풀이 되었다.
***
이계남의 차남 이량(1477-1522)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돈녕부주부로 근무했다.
전주이씨 남천군의 딸과 혼인을하였다.
남천군의 아버지는 영순군, 할아버지는 광평대군으로 왕실의 사람이었다.
손자 희현은 마전군수를 역임했다.
증손자 부는 대호군을 역임했다.
***
그러나 그 후 16세, 17세 18세, 19세까지 4대 연달아 이름만 기록되어 있고
관직명은 고사하고 생몰연대나 배우자의 이름조차 기록되어 있지않다.
***
갑자기 한미한 가문으로 전락하고 있는 느낌이다.
무슨 변고가 있었던 것일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당하여 가계가 몰락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조선왕실과 엮여 있는 집안이 이렇게 몰락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경우이다.
이계남의 손자대에서 중앙권력에서 급격하게 멀어지고 있다.
풍수공부는 족보와 현장을 연계하여 확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계남 묘에서 내룡
의심스런 부분이
족보에서 발응(?)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조선초기 반짝하다가
조선갑족 반열에 오르지 못한 것이 풍수 때문일까?
[출처] [조선] 평창이씨 이계남*|작성자 서울풍수 김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