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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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11,971 작성일 18-07-16 11:36본문
선현사적(先賢事蹟)
8세손 광(匡)
고려 인종왕3년 을사에 나셔서 고려 명종왕때에 태사광록대부 추밀원부사 이부사사 동북양도 순문사(太師光祿大夫樞密院副使吏部司事東北兩道巡問使)의 벼슬을 지내시고 백오군 봉함을 받으시니라
9세손 중인(仲仁) 자는 중사(仲思) 시호는 문충공(文忠公)
벼슬은 찬화벽상공신(贊化壁上功臣)으로서 대도정승(大都政承)을 세차례 지내셨고 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내시고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으시니라
공이 나이 20세 때에 첫째로 문과에 합격하시고 사십세 전에 높은 재상 지위에 오르심으로 이때의 나라에 다시없는 젊으신 어진 재상이라고 국민이 우러러 일렀고, 고려조 충신 목은선생(李穡)이 공의 묘갈명 비문에 이르기를
道德之首요 文章之宗이라 功在社稷하고 澤流生民이라
도덕지수요 문장지종이라 공재사직하고 택류생민이라
(해석)
도덕의 으뜸이오 문장의 조종이라 공로는 국가의 일을 크게 이룩하고 그의 덕택이 만민에 미쳐서 생활안정을 도모하야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다고 새겨져 있느니라.
11세손 견(堅) 자는 군보(君寶)
고려조 고종26년 기해에 괴성균시삼등대과(魁成均試三登大科)에 성균진사에 첫째로 합격하고 세 차례에 걸쳐서 문과 시험에 합격하셨는데 그 당시 유명한 최득평씨와 한가지로 고려사기에 기록되어 있고, 벼슬은 추성 보사공신 전서랑(推誠保社功臣典書郞)을 지내시니라.
13세손 주(稠)
고려 원종왕 때에 문과에 오르시고 고려 충열왕 때에 밀직사(密直使)를 지내시고 국가에 크게 공훈이 있음으로써 중서시랑 추충익대 좌리공신(中書侍郎推忠翊戴佐理功臣)을 지내시고 또 평성군(平城君)을 봉하시니라.
13세손 숙(肅)
선원록(璿源錄)에는 공숙이라 기재되어있음. 선원록은 조선왕족직계 보첨을 이름
중국 원나라 조정에서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벼슬을 지내시고, 고려 공양왕이 나라를 잃고 조선 이태조 성계씨가 나라의 왕위에 오르신 후 노산부원군(魯山府院君)을 추봉하시고, 이태조께서 부원군의 불천사우(不遷祠宇)를 평창에 세우시고 금포(錦袍)와 서각대(犀角帶)를 하사하시고 매년 봄과 가을 양철에 치제하는 예관을 보내시고, 또 평창 근군의 수령에게 명하야 치제 하시도록 하시니라. 영종대왕 4년 무자에 영종께서 다시 사우를 중수하시고 예조에 명령하시와 향사하는 관복을 하사하시고 그해 10월에 시신 우부승지(侍臣 右副承旨) 김이정(金履正)을 치제예관(致祭禮官)으로 보내시는 동시에 영종께서 친히 지으신 축문을 대독하고 치제하도록 명령하시니라
영종대왕 어제 치제문(英宗大王御製致祭文)
穆祖初載(목조초재) 天作之合(천작지합)
毓祉篤慶(육지독경) 肇我赫業(조아혁업)
如周緜籙(여주면록) 自初姜媛(자초강원)
推本所生(추본소생) 禮宜精禋(예의정인)
錦袍犀帶(금포서대) 聖祖攸錫(성조유석)
逖彼桑鄕(적피상향) 尙有舊蹟(상유구적)
迺造祠版(내조사판) 迺建妥宇(내건타우)
迺命近臣(내명근신) 替侑尊酒(체유존주)
[해석]
목조는 처음 하늘이 이성의 부부의 합하심을 지어 주심이라 목조왕비께서는 번성하고 복이 있는 터를 이룩하시고 모든 일에 대하셔서 항상 두텁고 경사스러운 일을 실천 하심으로써 우리의 왕업이 대대로 빛나게 하신 유덕이온바, 그 유덕은 주나라의 면녹과 같고 강원의 성스러운 일을 본받아 내려서 주심으로써 비로소 우리 태조께서 왕업을 이루게 하신고로, 마땅히 예로써 제사를 정성스럽고 정결하게 올리는 뜻을 베푸셔서, 금포와 서각대를 태조께서 하사하신 바가 있고 멀고 먼 성향이신 평창에 사우를 세우신 구적이 있음으로, 이에 사판과 사우를 다시 중수하고 시신을 보내어서 대신 준주를 올립니다.
사우를 광무원년에 서울로 봉안하였다가 기미년에 후손 재영(榟榮)씨가 북청 양화면으로 봉안하니라
이태조께서 부원군의 사우를 평창에 세우신 성지 목조대왕은 전주이씨 시조 한(翰)씨로부터 18세손이 되시는 분인 바, 부원군 숙씨의 따님을 맞아서 부부가 되신 후 왕비 되신 평창이씨는 성덕을 베풀어서 왕자와 왕손을 교양하심에 육덕(六德)과 육행(六行)과 육예(六藝)로써 가르치어서 그 성스러운 교훈이 후대에 미쳐서 내려옴으로써 5세손이 되시는 성계씨 같으신 영웅이 나시어 조선초대 왕으로 등극하시니 이분 이곳 이태조시니라. 이태조께서 왕업을 이룬 것은 왕비의 유덕이라 성념(聖念)하시고 목조대왕의 장인 되시는 분 부원군 숙씨의 사우를 평창에 세워서 매년 춘추 양절에 치제하도록 명령하시니라
[참조] 목조대왕이 익조대왕을 탄생하시고 익조대왕이 도조대왕을 탄생하시고 도조대왕이 환조대왕을 탄생하시고 환조대왕이 태조대왕을 탄생하시니 태조대왕이 목조대왕의 5세손이 되시니라
평창군의 연혁
고구려때에는 욱오현이라 하였고 신라때에는 백오군이라 하였고 고려충숙왕 25년에 현령을 두어서 군을 현으로 고치였더니 이태조가 왕위에 오르신 후 태조원년에 효공왕비에 성향임으로 다시 군으로 승격시키시니라 평창의 옛날 군명은 욱오, 백오, 노산, 노성이라 하였음
14세손 굉(宏)
고려 충목왕때에 군부판서(軍簿判書)를 지내시고 중국 원나라 조정에서 도독(都督)을 지내셨는데 그 공이 컸으므로 원나라 천자 순제께서 새첩(璽牒)을 써서 공적을 찬하 하셨다. 그 글은 몽고 글자로 총48자로 쓰여져 있으며 기미보책 발간할 때까지 평양에 살고 있는 후손 창희댁에 600년 동안 보관되어왔고 그 사본이 우리족보 기미보와 무술보에 등재되어 후손들에 기념으로 되어있음
15세손 천기(天驥) 초휘는 간(玕) 호는 백하(白河)
고려 충숙왕 원년에 나시고 생원시에 첫째로 합격하시고 공민왕 4년 을미에 중을과(中乙科)하시다. 중국에 명국황제가 등극한 뒤에 치명사신으로 명국에 들어가시다. 이때에 남만이 명국을 침범하여 난이 일어났으나, 명국 조정에서는 이를 방어할 장재가 없어서 근심하던 차에 명국 조정대신 등이 공의 문장과 무예가 출중하고 지혜와 용역이 과인함을 보고 가히 큰일을 맡김직 하다고 대신 등이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께서 불러보시니 사람에 지내는 웅재가 있는지라 준마 한필과 갑옷과 칼을 하사하고 그 무예를 시험하여 본즉 과연 일세의 영웅이라 곧 대장 인신을 하사하고 군마를 발하여 남만을 치게 하시다. 남만으로 더불어 수월을 싸우다가 남만을 쫓아서 남만국에 깊이 들어가서 2년 만에 남만을 항복받고 개선하여 돌아오시다.
황제가 그 큰 공을 아름다이 여기시고 산기상시(散騎常侍)라는 높은 벼슬을 하사하시니 공이 죽기로써 사직하고 행직하지 아니하기로 맹세하시자 황제가 말씀하시되 “경(卿)이 어찌하여 벼슬을 받지 아니하고 그다지 사양하오.” 하시니
공이 황제에게 아뢰되 “신이 만일 이 벼슬을 행직하면 고국에 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이 벼슬은 고국의 국왕과 신의 직품과 동급이 되오니 위로는 해와 달의 밝은 것을 우러러서 보기가 어렵고 아래로는 강산의 아름다운 땅을 밟아서 행하기가 어렵게 되옵니다.” 하고 아뢰니
황제가 말씀하시되 “이 벼슬인즉 일품의 벼슬이라 공신의 큰 공로와 어진 덕을 저버리리오, 조선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더하여 승격하노니 다시는 사양하지 마시오.” 하고, 인하여 처음 이름 간(玕)을 황제가 친히 천기(天驥)라 사명(賜名)하시니라
3년이 된 뒤에 고국에 돌아오신 즉 고려왕조 공양왕이 이 나라를 잃고 이 태조가 등극하여 왕위에 오르시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도읍을 한양에 옮겼으므로 나라가 바뀌어져 이씨의 왕국인 새 세상이 된지라 드디어 나라가 바뀐 것을 감동하시어 시를 읊으시니
한수인하는 개승지하고 漢水煙霞는 開勝地하고
송경화초는 모황진이라 松京花草는 沒荒塵이라
고궁낙월은 여잔백이오 故宮落月은 餘殘魄이오
신시비풍은 총모춘이라 新市悲風은 摠暮春이라
[해석]
한강에 끼인 연기와 안개는 승지강산을 열었고
송도 서울에 아름다운 꽃과 풀은 거친 땅 티끌에 빠졌도다
송도에 있는 옛 궁궐에 떨어지는 달은 쇠잔한 넋만 남아있고
한양 서울 새 저자에 슬프고 쓸쓸한 바람이 저물어 가는 봄과 같도다
3년간을 은거하시고 세상으로 더불어 통하지 아니 하시니라. 이태조가 그 절개를 아름다이 여기시고 평창군을 봉하시니 사적이 여지승람(輿地勝覺)에 기재되어 있느니라. 공이 평상시에 정포은(鄭圃隱)과 길야은(吉冶隱) 두분 선생을 사귀어서 서로 붕우의 의로 친절히 지내셨다. 공이 치명사신(致命使臣)으로 천조에 들어가실 때에 포은선생으로부터 송별시가 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서생수중검이 조담광망신이라 書生手中劒이 照膽光芒新이라
도해알천자요 승주사고인이라 渡海謁天子요 乘舟辭故人이라
추풍예성항이요 명월양자진이라 秋風禮成港이요 明月楊子津이라
호거근왕사하야 귀래막준순하라 好去勤王事하야 歸來莫逡巡하라
[해석]
서생의 손가운데 칼이 쓸개에 비치어서 칼날이 빛나서 새로웁더라
바다를 건너면 천자를 뵈일터이오 배를 타니 벗을 하직하는 도다
가을바람에 예성항구를 지나고 밝은 달밤에 양자강을 건너는도다
연고 없이 편안히 가서 나라일을 부지런히 하여
고국에 돌아와서 차이가 있는 두 가지 일을 하지 말지어다.
(참조) 그 때에 우리나라는 명국의 제후국임으로 우리나라 왕의 직위는 명국에서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의 직품에 해당한 것으로 취급하고 명국의 산기상시라는 직품이 은자광록대부에 해당함으로써 공의 직품과 고국의 국광의 직품과 동급인 고로 공이 행직아니하시기로 맹서하시니 명국황제가 우리나라왕의 직품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해당하는 일급의 직위를 올린 바이니라.
15세손 성(星)
벼슬은 선수선무장군 관군만호(宣授宣武將軍管軍萬戶)를 지내시다. 공의 나이 20세에 문과시험에 합격하시고 문학을 힘써 연구하심으로 그 당시 학자 등이 사방에서 구름과 같이 모여서 그 강론하심을 듣고 문학의 문고라 일러서 그의 문장이 세상에 뛰어 나셨고 또 그 뒤에 벼슬은 성균제주(成均祭酒)를 지내시고 문경공(文景公)의 시호를 받으시니라 공이 벼슬을 사직하시고 은퇴 하실 때에 퇴로시(退老詩가) 있으니, 그 시에 이르기를
약체청풍은 기아노요 죽계명월은 유오정이라 藥砌淸風은 欺我老요 竹溪明月은 誘吾情이라
전소이결에 귀전계니 설진강남에 필마행이라 前宵己決에 歸田計니 雪盡江南에 匹馬行이라
[해석]
약풀을 심은 섬 뜰에 부는 맑은 바람은 나의 몸이 늙어 가는 것을 속이며
푸른 대 수풀 시내 맑은 물가에 비취는 밝은 달은 나의 심정을 유인하는 도다
어제밤에 전원으로 돌아가라는 뜻을 결정하고서
오늘날 흰눈이 다 사라진 강남땅 평평한 길에 한필 말에 올라서 한가히 행하는 도다
공이 귀향할 때에 장상(將相)과 고우(故友)가 인해(人海)를 이루어서 전송 받으시니라
15세손 유(瑜)
고려 충숙왕15년 무진에 출생하시고 고려 공민왕조때에 문무 양과에 합격하신 후 동북양도 순문사 평장사(東北兩道巡問使平章事)의 벼슬을 지내시고 중국원조에 들어가셔서 과거에 합격하신 바, 그 시문과 필법을 중국 사람이 절묘하다고 다투어 보고 칭송이 높았다는 사적이 여지승람(輿地勝覺)과 동국사기(東國史記)에 기재되어 있느니라.
16세손 갈(秸)
고려 우왕 때에 국가에 훈공이 많으심으로 계인군(啓仁君) 봉함을 받으시고 사직하시여 북청으로 은퇴하시니 상시공의 둘째 아드님이 되시니라
16세손 과(科)
고려 충목왕2년 병술에 출생하시고 벼슬은 사직(司直)을 지내셨는데, 산기상시공(散騎常侍公)이 은거(隱居)하시자 따라서 은퇴하시다. 이태조께서 여러 차례 부르시나 출사하지 아니함으로써 그 때의 사람이 그 높은 절개를 아름다이 여기고 거사(居士)라 칭하니 상시공의 셋째 아드님이 되시느니라.
19세손 지(芝) 개휘(改諱) 배(培)
정통갑자년에 출생하시고 세조 병술년에 처음으로 선교랑(宣敎郎)을 지내시다. 성종 무신년에 예빈사직장(禮賓寺直長)으로 지내시다가 폭군연산주(暴君燕山主)가 성질이 사납고 음탕하여서 주색과 성악에 빠져서 사치와 호화스런 일만 숭상하고 조정에 충신을 살해하고 귀양 보내고 국민을 괴롭게 하는 학정만 베푸는 고로 이를 시정하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차례 충간하셨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그 당시 이청(李淸)씨라 하는 충신이 충간 하다가 귀향감을 보시고 그 때에 같이 벼슬하던 박수양씨와 같이 사직하시고 본향에 은퇴하시다.
도덕을 닦고 학문을 강론함으로써 사방에서 유명한 젊은 학자가 구름 모이 듯하여 문하에 제자가 다수하니라. 또 당시 도학이 높은 점필재(佔畢齋) 김공을 친한 벗으로 사귀어서 세상사를 논의 하시니라. 그때에 폭군 연산주를 추방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시고 여러 차례 부르셨으나 출사하지 아니하시다가 왕께서 다시 예우로써 부르심으로 입조하시와 사직(司直)의 벼슬을 지내시다가 국가에 공훈이 많으심으로써 이상(二相)이라는 높은 벼슬에 오르시니라. 공이 71세에 서거하시니 왕께서 조관을 보내시여 치제함을 명하시고 정숙공(靖肅公)의 시호를 하사하시니라.
19세손 계남(季男) 자는 자걸(子傑), 호는 청운(靑雲), 시호는 익평공(翼平公)
정통무진년에 나시고 병충분의 익운 정국공신 숭록대부 행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봉 평원군(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崇祿大夫行吏曺判書 兼 判義禁府事封平原君)의 관직을 역임하시다. 공이 천품이 뛰어나시어 나이 23세 때에 문과에 합격하시고 풍덕군수, 한성부서윤, 승정원동부승지, 이조참의, 호조참의,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시고,
내직으로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同知中樞府事 兼 五衛都摠府副摠管)을 지내시고, 임자에 명국 황제의 태자 책봉의 조서가 본국에 있음에 공이 사은사로 명국에 들어 가셨다가 환국 하셔서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임명되시고 그 익년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배하심을 받으시고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셨다가 돌아오셔서 한성부우윤을 지내시고 갑인에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셨다가 서울에 돌아오셔서 호조참판을 지내시고 다시 대사헌 임명함을 받으시고, 또 형조참판에 전임하시고 갑자에 호조판서에 승직하여 금부(禁府)의 임무를 겸하시니라.
혼주연산이 날로 더욱 학정이 심하여 감으로 병인년 9월에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제공이 한나라때 곽광의 옛일에 의하여 혼주를 폐위추방하자는 의거를 모의하는 날 밤에 모든 계책이 결론을 짓지 못하고 마음만 번노히 지내고 있을 이때에 공이 늦게 이르셔서 모든 일을 시행함에 그 계책이 세밀하여 완전히 성사하겠음으로 좌우가 그 계책을 탄복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는지라 이에 그 계책에 의하여 혼주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모셔서 왕위에 오르시니라.
정국의 공훈으로 인하여 병충익운 정국공신 숭록대부 행 이조판서 평원군(秉忠翊運靖國功臣崇祿大夫吏曺判書平原君)을 봉 하시고 익평공(翼平公)의 시호를 하사 하시니라. 공이 평소에 성종의 지우의 은총을 입으시고 또 국조명신 점필재 김공으로 더불어 친우를 삼으시고 세상사를 논의하시니라.
공이 임신년삼월에 병으로 서거하시니 향년이 65세라 병중에 계실 때에 왕께서 어의(御醫)와 약을 하사하시고 또 중사(中使)를 보내시어 문병하시더니 서거하심에 안타까운 심회를 품으시고 특히 부의를 하사하시니라. 공의 묘소의 신도비문은 숭정대부 좌찬성 대제학(崇政大夫左贊成大提學) 신용개(申用漑)씨가 찬(撰)하니라. 국조명신 사재 김상공정국(國朝名臣思齋金相公正國)씨가 만사문(輓詞文)을 올렸는데 그 만사문에 이르기를
훈업삼조노요 중흥사직신이라 勳業三朝老요 中興社稷臣이라
공심유조감이오 시론속태균이라 公心留藻鑑이오 時論屬台勻이라
홀비충청덕이요 운망기구인이라 忽秘忠淸德이요 云亡耆舊人이라
공휘양자누하고 제만경첨건이라 空揮羊子淚하고 題輓更沾巾이라
[해석]
삼대국조에 공혼이 컸었고, 사직을 중흥한 충의가 큰 신하로다
공명정대한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고, 국민의 여론은 덕이 높은 재상으로 우러러 보는 도다
홀연히 충의가 높고 맑은 덕을 감추시고, 하늘로 돌아가시니 옛날에 지기하는 친우를 잃었도다
공연히 양자의 눈물을 뿌리고, 한붓으로 만사의 글을 쓰니 슬픈 눈물이 수건을 적시는 도다
19세손 계동(季仝)
성종조 때에 무과에 합격하시고 공의 나이 29세때에 대사헌(大司憲)과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시고 정국하신 공훈으로 보국 숭록대부 영중추부사(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와 헌무공(憲武公)의 시호를 하사하심을 받으시니라. 소총 홍유손씨(篠叢 洪裕孫)씨가 이르기를 문무의 전재를 겸하여 있고 또 은덕과 높은 절개가 있다고 칭송하였고, 평소에 국조명신(國朝名臣) 점필재 김공으로 더불어 서로 시문을 수답하시며 상종하셔서 소일 하시니라. 공이 서거 하신 후, 나라에 이름이 높으신 중암김선생(㑖庵金先生)이 만사문을 올리시니라
[輓詞文]
장성광채영문성 천견창진악강령 將星光彩暎文星 天遣昌辰岳降靈
새외장성웅북한 조중지주치동명 塞外長城雄北漢 朝中砥柱峙東溟
장혼종여건곤화 고절응전고정명 壯魂縱與乾坤化 高節應傳鼓鼎銘
수단인생종고사 검현잔막구당편 修短人生從古事 劒懸殘幕舊堂扁
핵최상골수추천 일몽공명오십년 翮摧霜鶻隋秋天 一夢功名五十年
연의화류시월하 실은앵무읍풍전 戀義華騮嘶月下 失恩鸚鵡泣風前
남루흥산공청야 녹야향비쇄모연 南樓興散空淸夜 綠野香飛鎻暮煙
초창상두현보검 적성고원유영변 怊悵床頭懸寶劒 笛聲高怨柳營邊
[해석]
장성의 광채가 문성에 비취어서 하늘이 창신을 보내시고 오악은 실영을 내렸도다
변방밖에 진성은 북한에 웅장하였고 조정가운데 지주는 동명에 우뚝 하였더라
장한 혼은 놓아서 건곤으로 더불어 화하였고 높은 절개는 고정에 전하여 새겼더라
수단하는 인생이 옛일을 쫓았고 칼은 쇠잔한 장막 옛 당중에 걸렸도다
빨리 날고 날랜 매는 가을 하늘에 떨어졌으니 꿈속 같은 공명이 50년을 지났더라
주인을 생각하는 의가 있는 빛난 준마는 밝은 달 아랫 울고 은혜를 잃은 앵무는 바람앞에 울더라
남쪽 누대에 걸었던 흥은 맑은 밤에 흩어지고 푸른 들의 향기는 자욱한 연기가 저문 가운데 날었더라
슬프고 슬픈 빈 책상머리에는 보검이 걸려있고 피리 소리는 버들진터 가에서 원망스러이 높았도다
19세손 계전(季甸)
갑인생 단종초에 수충위사협찬 정난공신 숭정대부 행 병조판서 겸 의금부도사(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崇政大夫行兵曺判書 兼 義禁府都事), 황해도관찰사, 병조참의, 형조참의, 병조참의좌찬성을 역임하시고 정난공신으(靖難功臣)로 공훈이 컸으므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을 봉하고 문열공(文烈公)의 시호를 받으시니라
19세손 훤(萱)
공이 소년때부터 문학연구에 깊은 뜻을 두시고 모든 서적을 섭남하시니 특별히 성리학에 더욱 힘써서 세상 사람이 동방의 도학군자라는 지층을 받으시니라. 벼슬은 사직(司直)으로 지내시다가 사임하신 후 특별히 도학이 높으신 고로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經筵參贊官)의 증직을 받으시니라
19세손 완(莞)
관사용(官司勇) 증가선대부 병조참판(贈嘉善大夫兵曹參判) 공이 능문선서하시고 기품이 호매하시고 풍자가 수미하시여 신선의 풍모가 있어서 세상 사람이 신선중에 일인이라는 지칭을 받으시니라. 공이 출사의 뜻이 없어서 사임하시고 팔역강산(八域江山)을 주유(周遊)하시니라.
20세손 창(敞)
홍치팔년 을묘에 생원에 합격하시고 중종조에 홍문관박사 통훈대부 영광군수 호조정랑(弘文館博士 通訓大夫 靈光郡守 戶曹正郎)을 역임하시고 연산주를 폐위 추방하신 공훈으로로 정국공신으로 공조판서(工曹判書)의 관직을 임명하시고 평천군(平川君)을 봉하시니라
21세손 희석(希奭)
홍치2년 기유에 출생하시고 가정12년에 진사 낭천현감 봉정대부 남원부사(進仕狼川縣監奉正大夫 南原府使)의 직위 임명을 받으시니라. 공의 성품이 청렴결백 하시어 일에 당하여 처단하시는 것이 추호라도 차이가 없어서 공명정대 하심으로 치적이 높으심으로 경내에서는 야불폐문(夜不閉門)하고 도불습유(道不拾有)하여 송성(頌聲)이 높았음으로 특별히 남원부사를 제수 하시니라.
22세손 택(澤)
정주목사 영변부사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행 갈성분위진무공신 가선대부평원군(定州牧使 寧邊府使 資憲大夫 戶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摠管行 竭誠奮威振武功臣 嘉善大夫平原君)을 봉하시니라. 사적이 문헌록공신편(文獻錄功臣編)에 기재되어 있느니라.
22세손 회두(晦斗) 자는 이장(而章) 호는 정거재(貞巨齋) 회
영종왕때에 출생하시어 자친되시는 이씨가 일찍이 낮에 졸다가 봉회산에 올라가니 작은 기린이 석굴에서 쫓아서 나오는 것을 품안에 안고서 깨달으니 한 꿈이라. 이로부터 잉태하니 부공되시는 사암공이 이상히 여기고 있었는바 본 읍부사 조근씨가 봉회산을 바라보고 하는 말이 후일에 반드시 이산 운기로 인하여 군자가 나오리라 하더니 과연 그의 응조에 의하여 공과 같으신 군자가 나시니라.
공이 천품이 총명하여 널리 학문을 닦으시고 특히 성리학을 연구하심으로 도학이 높아서 중종왕께서 참봉을 제수 하시니 행직하지 아니하시는 고로 어필친제주서(御筆親製朱書)와 9종의 물품과 보묵을 하사하시고, 그해에 또 11종의 물품을 하사하시고, 또 익년 병진에 12종을 물품을 하사하시니 왕의 은사가 두세 차례에 이르지 아니한지라,
공이 말씀하시기를 임군이 하사하신 물건을 감히 사사로이 쓰지 못한다하고 제전과 서적을 사서 친족에게 나누어 주니 왕께서 이 사실을 들으시고 아름다이 여겨서 말씀하시기를 선비의 도가 마땅히 이같이 할지로다 하시다. 이 사적이 잠헌록징사편(簪憲錄徵士編)에 기재하여 있느니라. 공의 묘갈명문은 대사헌 은진송병선(恩津宋秉璿)씨가 지으시니라.
23세손 백란(伯蘭) 자는 덕형(德馨)
중종 갑오년에 출생하시고 선조 갑술년에 진사에 합격하시고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으로 지내시다가 환로(宦路)에 뜻이 없어서 사직하시고 평창군 남쪽 오도산(吾道山)에 은퇴 하시와 도를 닦고 학문을 강론하시다. 공의 시문필법이 당세에 뛰어났음으로 문하를 쫓아서 배우는 자가 심히 많아서 노성의 문학이 이로부터 다시 진흥하니라.
23세손 인서(仁恕)
중종 계묘년에 출생하시고 선조때에 장사랑(將仕郎) 벼슬을 지내시니라. 공이 소년시절로부터 천성이 활달하여 무예에 능숙하여 말타기와 활쏘기와 칼쓰기를 잘하심으로 그때의 사람이 장재가 있다고 이른바, 선조때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국난을 구하자는 충의의 마음을 굳게 잡으시고 의병을 모집하여 평창군수 권두문, 라수천, 지사함과 같이 평창군 남쪽 응암굴에 군사를 매복하였다가 왜적이 당도함을 당하여 돌격하니 왜적이 강중에 빠져 죽는 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고 왜적의 사체가 강이 메이고 피가 강물을 이루어서 영월땅 사천까지 흘러갔다. 왜적의 후진의 군사가 많았음으로 적은 군사로써 많은 왜적을 대적하는데 최후까지 싸우다가 의를 굴하지 아니하고 응암굴(鷹巖窟)에서 전사하시니라. 그 충용하신 공훈으로 평난후에 병충진위장군(秉忠振威將軍)의 직을 선조께서 하사 하시니라
23세손 정충(廷忠) 자는 사신(士信)
어모장군 전라 수우후 선전관 무과 내금장 훈련원정(禦侮將軍全羅水虞候宣傳官武科內禁將訓鍊院正)을 역임하시고 공이 소년시대로부터 무예를 숙습하시여 장재(將材)의 천출이 되어서 선조 임진왜란 때에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부장으로 전공을 많이 세우고 불행히 전몰하시니라 사직이 충무공 일기에 기재되어 있느니라.
23세손 수원(壽鵷)
선조 신미년 9월에 출생하시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시고 국가에 공훈이 많으심으로 평원군을 봉하시니라. 효종 삼월에 서거하시니 효종왕께서 부의로 관을 하사하시고 예관을 보내시어 치제하시니라
23세손 정훈(正薰)
숙종 경신년에 출생하시고 무자년 9월에 문과 시험에 합격하여 입궐하시니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한집안에 일곱 사람이 문과에 합격하니 어찌 그 우연한 일이랴(一門七科豈其偶然)’ 이 여덟 글자를 친히 써서 하사하시고 한림학사 사간원 정언 겸 보록청 편수관 수찬관(翰林學士司諫院正言兼寶錄廳編修官修撰官)을 임명하시니라
26세손 사명(思命) 자는 천약(天若)
명종 경술에 출생하시고, 장연, 평산, 상원, 남원, 수원, 경기수사 훈련원도정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京畿水使訓鍊院都正兼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시고 선조때 임진왜란에 전공이 많았었고 인조때 이괄반란에 공이 컸음으로 충주에 전승비가 세워있고 임진란과 이괄란 두차례에 걸쳐서 공이 컸음으로 강무공(剛武公)의 시호를 받으시니라
28세손 광부(光溥) 자는 자연(子淵)
숙종 갑술에 출생하시고 명경과 합격하시고 보국 숭록대부 행 동지중추부사 겸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봉조하(輔國崇祿大夫行同知中樞府事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奉朝賀) 외직으로 대동, 기도, 응안, 벽동, 순천, 종성, 울산, 풍천, 강계, 진주, 홍주, 경성읍 등의 군수, 부사, 목사, 의관직을 역임하셔서 치적이 밝으심으로써 송덕이 자자하니라. 병술년에 기사(耆社)에 들어가심에 왕께서 자주 부르셔서 입궐하여 전상에 오르실 때에 왕께서 내시를 명하시어서 부액(扶腋)하여 전상(殿上)으로 오르시게 하고 보묵(寶墨)을 자주 자주하시니라
임진년에 치정(治政)하시니 왕께서 말씀하시되, 권조
세한연후에 지송백지후조라, 여어경에 전미구용권우라 歲寒然後에 知松栢之後凋라 予於卿에 全未究用眷遇라
[해석]
해가찬 연후에 송백이 뒤에 떨어짐을 알지라 내가 경에게 전연이 대우함을 다하지 못하였노라
왕의 은총을 입으신 것은 비할 때 없었느니라. 향년80세에 서거하시니 왕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조판을 보내어서 장례를 이루도록 하시고 치제를 명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