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공의 아버지인 이영상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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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5,766 작성일 18-08-24 10:43본문
장승제로 유명한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 마을은
우리 정숙공 할아버지의 아버지인 "이영상"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마을입니다.
우리 평창이씨의 세거지였던 그곳에 관한 기사자료입니다.
이영상 할아버지는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훤(萱), 완(莞), 미(薇), 지(芝), 채(菜)]
모두 벼슬을 하시고, 이중 4형제가 사후(死後)에 왕으로부터 시호(諡號)를 받으시고
첫째 훤(萱)은 사직공(司直公)의 시호를 받아 사직공파로
둘째 완(莞)은 사용공(司勇公)의 시호를 받아 사용공파로
세째 미(薇)는 첨정공(僉正公)의 시호를 받아 첨정공파로
네째 지(芝)는 정숙공(靖肅公)의 시호를 받아 정숙공파로 분파하였으며,
막내인 다섯째 채(菜)가 아버지를 모셨으며 슬하에 따님 한분을 두셨다 한다.
이 따님이 함양박씨에게 출가하여 아들셋을 두었는데 모두들 큰 벼슬을 하여
함양박씨를 부흥한 분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시제에도 이분들 5~6명이 참석하였다.
사실, 우리는 오래전에 이할아버지 묘소를 실묘하고 찾지 못하였었는데,
이 할머니 자손들이 400년 이상을 이영상(李永祥)할아버지와 이채(李菜)할아버지 묘소를
돌보아 오던중 1958년도에 평창이씨 족보를 편찬한다는 일간신문의 광고를 보고
평창이씨를 찾아와 그간의 내력과 유토를 돌려 주었다 함.
결국 이영상 할아버지는 400여년간을 외손봉사를 받아왔던 것이다.
기사내용입니다.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마을 : 장승제로 유명한 함양박씨 마을
2003-07-08 22:05 | VIEW : 122
소라실의 공식행정지명은 송학리(松鶴里) 2구이며, 송학리 2구는 다시 3개 반으로 나뉘어 1·2반을 ‘소라실’, 3반을 ‘토옥골’이라 부른다.
소라실’이란 지명이 유래하게 된데는 몇 가지 전해오는 말들이 있다. 첫째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마을의 형상이 마치 ‘소라’와 같다하여 이런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소가 누워있는 형국의 땅이라 하여, ‘소와실’, 이것이 ‘소라실’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혹은 마을 앞의 논이 소의 젖가슴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마을회관 앞을 소의 밥통에 비겨 말하기도 한다. 세번째 설은 소나무가 무성한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솔아실’(지형도에는 이렇게 표기되어 있다), 또는 소나무 사이로 작은 길이 있어서 그 소로길로 들어가는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소로골’이라 부르던 것이 변해서 ‘소라실’로 불리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서 마을 사람들은 앞의 두 가지 설을 주로 믿고 있다.
소라실 마을 앞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있는데, 마을에서는 이 산을 괘등혈(掛燈穴) 또는 등잔혈이라고 부른다. 이 산의 형세가 등잔과 같아 마을에 화재나 질병이 빈번했는데, 이것을 막고자 해마다 집단적으로 불놀이 또는 액맥이를 해서 재앙을 물리치려고 했다. 이러한 의도에서 장승제라는 집단행사가 유래했다고 한다. 소라실 마을은 과거에 마을 입구를 흘러가는 냇물을 기준으로, 하여 서편의 삼태봉 마을과 동편의 태봉 마을로 구분되었다. 지금은 마을을 관통하는 도로를 기준으로 동·서로 나눈다
마을이 이처럼 동·서로 나뉘는 것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설화가 있다. 소라실 마을은 예로부터 크게 번성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부유해지는 것을 시기한 중이 나타나 마을의 날을 끊어야 더욱 번성할 수 있다고 거짓으로 전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동·서로 나누었는데, 오히려 재앙만이 일어나자 그제서야 중의 말이 속임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나누어진 마을을 되돌릴 수는 없어, 양쪽에 장승을 세우고 액맥이를 하였다는 것이다
괘등혈의 액맥이와 관련하여 북쪽으로부터 내래오는 액을 막는 것이 각각의 길목에 있는 서낭당이다. 동북쪽의 국동리와의 경계인 고개에 서낭당이 하나 있고, 서북쪽 유하리와의 경계에도 서낭당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도로 개설 과정에서 유하리쪽의 것은 없어지고 국동리쪽의 서낭당만 남아있다.
‘소라실 마을’하면, 무엇보다 유명한 것이 장승제이다. 소라실 장승제는 1984년 전주 민속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수상을 하기도 했고,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승제와 부대 행사는 이틀간 진행되는데, 정월 열나흩날은 동쪽 매봉 기슭의 신랑 마을과 서쪽 삼태봉 기슭의 신부 마을이 각각 유사의 집에서 샘굿을 지내고, 보름날은 아침부터 구척 장승과 오릿대의 기세배, 합방행사, 불놀이 방포, 음주농악 등을 하게 된다.
장승은 마을 어구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있기 마련인데, 소라실은 청양에서 탄천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소라실 장승은 서쪽마을 입구와 동쪽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장승의 명문은 방위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쓰여 있는데, “동방천하축귀대장군(東方天下逐鬼大將軍, 동)과 서방지하축귀대장군(西方地下逐鬼大將軍, 서)로 되어 있다.
소라실 장승제의 절차는 공주의 다른 지역의 것과 대체로 유사하다. 그러나, 기세배(旗歲拜)에 있어서 서편 마을(신부)에서 음식을 준비한다든지, 서편 마을에서 절을 4배 할 때, 동편 마을(신랑)에서 2배로 답례한다든지, 동편 마을에서 서편 마을 농기에 채단을 묶어준다든지, 신랑신부 장승을 합궁 시킨다든지, 방포를 쏜다든지 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제의 구성이 진지함보다는 축제적이다. 농기(農旗)는 동서마을 모두가 ‘신농유업’이며, 깃장목에 꽂는 깃털은 장끼털로 꽂는다. 동서 마을의 농기색은 동은 붉은 색, 서는 파란 색 인데, 이것은 남과 여를 뜻한다. 또, 합궁할 때, 묶는 끈이 빨강, 파랑, 노랑색 인데, 노랑(황색)은 중앙을 의미한다.
소라실 마을의 전체호수는 토옥골의 13호를 포함하여 46호이고, 이 중 함양박씨가 40호 정도를 차지하여 함양박씨 동족마을을 이루고 있다. 함양박씨가 이 마을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약 430년전 쯤의 일이라고 한다. 박문필(朴文弼)은 원래 전라도 김제에서 살았는데, 그가 죽자 처인 평창이씨(1504∼1567)가 아들 3형제와 딸 1명을 데리고 친정동네인 소라실로 옮겨와 자리잡게 되면서부터 라고 한다. 평창이씨 묘비문에 따르면, 남편인 박문필이 죽자(명종1년, 1545), 정성을 다해 좋은 땅을 골라 장사지낸 후, 세아들을 데리고 김제로부터 친정마을인 공주 소라실로 이주해 왔고, 그 후, 소라실에 살면서 정절을 지키고 자식들을 엄하게 길러 가문을 번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박문필에게는 묵(默), 혼(渾), 심(深)의 아들 3형제가 있었는데, 소라실에 거주하는 함양박씨들은 주로 2남인 박혼(朴渾)의 자손들이다. 혼(渾)의 자는 자호(子浩), 벼슬은 증직으로 좌승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포의(布衣)로 종군하여 중봉 조헌을 따라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참판을 추증받았다. 부인 김제조씨의 내조가 컸다고 전한다. 큰아들 묵(默)은 형조참판에 증직되었고, 심(深)은 통덕랑이다. 맏아들 묵(默)의 자손들은 송학1구에 많이 살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원래 소라실 마을에는 평창이씨가 세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박문필의 장인이었던 평창이씨 이채(李菜)와. 이채의 아버지 이영상(李永祥)의 묘소가 있는 것으로도 분명하다. 이영상(李永祥)은 강진현감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그의 묘소는 와우형 명당으로 불려지는데, 마을이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보았을 때, 소의 젖의 위치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소라실 함양박씨들은 입향 이후 관직에 나아가 이름을 떨친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계속 소라실에 머물면서 소위 ‘토반(土班)’으로서 위세를 유지하면서 동학란이나 6.25전쟁때도 비교적 보수적 입장을 취해, 아직도 드센’양반’마을 사람들이란 평을 듣고 있다.